하긴 눈에서 멀어지면 자연스레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법이지. 예의 밥 말아먹은 행동에도 유승현은 저에 대한 호감도를 지켜냈나 보다. 미안하게. 때마침 유승현의 출근 시간 전이었다. 신우재는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 뒤에 반가움이 섞인 유승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통화 가능해? 내가 공부 방해한 건 아니지?” - 헉, 형! 설마요! 저 형 ...
주방에는 다행히 전자레인지뿐만 아니라 전기 포트도 존재했다. 신우재는 물을 끓이고, 삼각김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린 다음, 컵라면을 제조해 평상으로 가지고 나왔다. 이렇게 있으니까 쉬러 온 것 같기도 하고. 낮에는 눈 시뻘게지도록 사람 죽인 놈을 찾아다니다가, 밤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 똑 떨어트려 놓으니까 더욱이 기분이 묘했다. 주방에서 마당으로 나온 사이에 ...
“방 지금 봐야 되요? 저 조금 쉬고 싶어서요.” “…올라가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왜요? 저 여기 있는 거 불편해요? 알았어요. 안 보이는 데에 처박혀 있을게요.” 일부러 시무룩한 척하니까 태오가 또 깜짝 놀라며 두 손을 휘저었다. 잘못했다고 할 기세다. “쉬고 싶은 데서 편하게 있어.” 그는 또 애매하게 웃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저장고를 열었다...
설마 대든다는 이유로 죽이기야 하겠어? “자네는 태오가 싫은가?” 그러나 유결이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제가 그 흡혈귀를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이상한 부탁 때문에 제가 도로에 날리는 시간에 몇 시간인지나 아십니까? 이번에는 대뜸 강원도까지 끌려오고, 아예 사건에서 빠지라는데 이 상황에서 누가 좋다고 꼬리 흔들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하...
신우재의 앞에 선 정장의 남성이 하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에는 흔한 문패 하나 없었다. 이거 국과수에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부서 맞나? 아니면 항의해야지. “들어갈게.” 그는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었다. 생긴 것처럼 아주 와일드했다. 여차하면 제압 못할 것 같은데…. 신우재는 쭈뼛쭈뼛 그 뒤를 따랐다.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 해가...
홍대는 평소와 달리 활기에 차 있었다. 눈 깜짝할 새 돌아온 주말이었다. 피해자가 들렸던 카페는 메인 골목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있었음에도 바글바글 만석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면서 CCTV 확인 가능 여부를 묻자, 알바생이 기다려달라며 직원실로 사라졌다. 얼마 뒤 알바생 대신 나타난 사장은 신우재를 직원실로 들여보낸 뒤 태블릿을 손에 들려줬다. ...
설지환은 약속했던 휴가를 떠났다. 그동안 신우재는 자칭 흡혈귀에게 두 차례 피를 가져다주었다. 낮에 잠깐 집에 들러서 피가 든 플라스크를 냉장고 한 쪽에 둔 특수 저장고에 옮겨 놓고 오면 끝이니 태오를 만날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귀중한 시간을 도로에 내다 버리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냥 또 이틀이 갔구나 하는 알람 정도로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잤어?” “기다리다 깜박 잠들었어.” 잠든 거였는지 목소리도 약간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설지환은 집주인 소개도 않고 그에게 많이 졸린지, 식사는 했는지, 책을 읽고 있었는지 짧은 대화를 다정히도 나눴다. 병풍이 된 김에 신우재는 다시 만난 태오라는 인물을 눈에 담았다. 저번에는 어두운데다가 긴장해서 몰랐는데, 주황빛 아래 그는 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
“이번 사건 신경 쓰는 것도 그거 때문이지? 이상해서. 사람의 짓이 아닌 것 같아서.” 다그치는 설지환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살짝 맛 간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번뜩거리는 눈빛이었다. 마치 취조하던 놈이 미끼를 물었을 때처럼. 이게 정말 그의 본론인 것이다. “…사건도 사건인데, 매스컴 반응도 이상하니까요. 뭐만 하면 개떼같이 달려드는 언론사에 이렇게 길...
설지환은 그런 신우재에게 행정직이나 다름없이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별일 아니라는 듯 감흥 없이 말했다. 조서 작성, 수사 보고서, 사건파일 정리 등 문서 좀 작성해주고, 공문이나 서류 써서 어디에 보내기만 해주면 된다고. 일단 팀에 들어와 보라고. 안전은 책임지겠다고. 강력반과 안전. 완전 모순적인 두 단어였지만, 당시 멘탈...
다행일지 불행일지 피해자는 집 근처만 열심히 돌아다녔다. 덕분에 신우재는 대학가 구석구석을 유람 중이었다. 대학 시절로 회춘한 기분이었다. 피해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그러다 가끔 밖으로 나와서 혼자 식당에 가거나,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그녀는 기본 두 시간, 혹은 더 길게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틀어놓고 공부했...
2. 경찰서에 도착한 신우재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배만 연신 태웠다. 머릿속은 이미 복잡해 터지기 직전이었고, 덕분에 한숨도 자지 못해 눈 밑까지 칙칙하게 물든 채였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일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났다. 그러나 그의 속임수에 속아 아무것도 못 해보고 눈앞에서 그를 놓쳐 버렸다. 그것도 단순히 뒤를 보며 놀란 척을 하는, 7살 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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